글 조각
금조개와 빈 종이

아주 까만 어둠을 덮고 후추같은 숨 겨우 내뱉으며, 구부린 등엔 노트르담이 스친다 돋아난 척추마다 불만이 깃들어 잠이 오지 않는 밤, 아무리 껍질을 여며도 너는 기름처럼 둥둥 뜰 것이다

네가 잠들지 못한 것은 빈 종이 그의 잘못
그러나 눈을 감고 생각하면 너는 한 권의 책이라도 되었던가, 아니면 흰 눈썹 한 가닥 감추고 있었던가? 그것은 그저 너무 희고, 또 날카로웠던 그의 탓인가 비누거품 문질러도 네겐 너무나 흰 어둠이다

먼지같은 햇빛 들어도 너는 고개를 들지 못한다
창 틈으로 걸어 들어온 저녁 덕에 그제서야 너는
그제서야 너는 네 작은 칼로, 껍질을 벗겨낼 것이다

한 글자 적히지 않아도 좋다,

네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있다. 우리는 모두 빈 종이다 우리는 모두 얼룩진 빈 종이, 네가 내쉰 숨들 한 편 시가 되도록 긴 허리 쭉 펴고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있다. 자개장 안에 터전을 깔아 두겠다, 나는 문을 활짝 연다
우리 삶은 길고 구차한 한 소절 변명이다

새로운 타입의 실향민

고향에 가면 공기부터 마음가짐까지 달라진다는 사람들이 낯설다.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는 12개의 반이 찍혀 있고 2년 주기로 이사를 다녔다. 사람들 모여 사는 도시라는 공간에 별 감흥이 없다. 내일 당장 포르투갈로 이사를 간다고 해도 싫을 것 없다. 말하자면 뿌리 없는 사람이다. 벼락 맞아 쓰러진 나무 둥치는 아니고, 부레옥잠 개구리밥 회전초처럼 둥둥 떠다니는…. 언젠가부터 유목민 같은 현대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자신을 섬으로 삼아 스스로 의지하며 살라, 하는 누구 말씀이 귀에 마음에 박혔던 것 같다. 위대하신 칭-칸처럼 세상을 정복하는 사람은 못 되더라도, 어디든 던져져도 카멜레온처럼 스며드는 사람이 되어야지 싶었다. 날 부르는 학교 가족 회사에 굴러가 사는 게 다라서 아직까진 곧잘 해내고 있다. 없어진 향수는 이상한 곳으로 향해서 태어나기 전 90년대를 그리워하고 영어 캠프 3주 다녀온 발렌시아를 그리워하고 영화 속 판타지 마을을 그리워한다. 디딘 순간 잃은 고향이니 여전히 실향민인 것은 다를 바 없다. 열심히 가상 고향 생각에 집중하면 피어오르는 손톱만 한 감상을 곱씹으면서, 이게 집 떠나 슬퍼하는 내 룸메 마음 비슷할까 상상해 본다. 아무도 날 부르지 않는 때가 오면 가서 살 곳을 찾아야 할 텐데, 어디로 가면 좋을지 고민이다. 이미 나는 태어났는데 새로운 고향을 가질 수 있을까?

어깨 위 그냥 밖에서 멍 때리다 보면,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다 무엇에 의지해서 무거운 삶을 지탱하는 걸까 싶다. 그나마 모래 밭 흙 벽 자갈 구덩이면 좋으련만 멀리서 보기에도 가파른 구십 도 경사 절벽 틈에 뿌릴 박아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이 견디는 무게에 대해 생각해 본다, 어쩌면 뿌리 내릴 힘은 어깨를 짓누르는 하중과 다를 바 없는 것 아닌가? 죄책감, 떠맡은 책임들, 지긋지긋한 관성이 가지를 짓눌러서, 사실은 발 빼고 훌훌 떠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 개미지옥에 박혀 있는 것은 아닐까? 염세적인 (그리고 쓸데없는) 상념에 푹 취해 있다가 결국은 야매 결론을 내린다. 그래도 개똥밭에 구르더라도 이승이 낫다고 했던가, 포기하지 않고 버틸 수 있게 해 준다면 그게 하중이든 용기의 원천이든 사실 중요하지 않겠다고. 내가 이 땅을 박차 버리고 장마 홍수에 막 떠내려가고 싶을 때 내 어깨를 꾹 눌러 주는 이가 있다면 그게 부담이든 격려든 참 고마울 것 같다고.


글 뭉탱이
몽타주
Q. 나의 지향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A.

지향점. 그 곳은 한 수사관이 바라던 모든 것이 위치한 곳. 그는 지향점을 찾기 위해, 그곳으로 향하는 한 운동체를 뒤쫓기로 했다. 지향점으로 향하는 놈이니 이름은 ‘지향’ 정도로 붙여 두었다. 수사관은 오랜 시간을 들여 지향, 그 놈이 걸어온 거리, 그 놈의 속력, 그 놈의 방향을 안다는 목격자들을 확보했다. 세 사람의 증언을 합치면 분명히 그 녀석을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녀석의 최종 목적지인 ‘지향점’을 추측해내 도달하는 것은 일도 아니겠지. 그는 확신했다.

수사관: 조사에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향을 목격하셨다고요?

취향: 네, 안녕하세요! ‘ 직접 본 적은 없고… 소문을 많이 들었어요. 신출귀몰한 녀석이죠. 형태는 엄청 큰 갈매기를 닮았어요. 날개가 아주 길구요. 그 녀석의 여정에 대해서는 저희끼리는 많이 들었어요. 연구했던 적도 있답니다. 안쪽 서재를 뒤져 보면 분명 책이 나올 거예요. 모두가 증언을 수집해 이뤄진 거라 확실한 건 없지만요. 그래도, 공통점은 항상 존재했어요.
그 녀석은 꽤 먼 거리를 이동해 왔을 거예요. 목격 소식이 들려온 점을 모두 이어 보면 1만 5천 키로미터 이상은 되거든요. 제일 먼저 들려왔던 소문은 아주 추운 지역이었어요. 어디 보자, 그 다음은 따듯한 초원을 따라 돌아다니고, 울창한 숲, 사막, 기계 도시… 가장 최근에는 콘서트 장을 경유했다는 이야기가 있네요. 그 이후에 들려오지 않던 특이한 울음소리에 대한 연구 자료가 추가된 걸 보니, 지나온 여정들이 그 녀석을 구성하는 것 같아요. 봐요, 숲에서 지난 이후의 깃털은 조금 알록달록해져 있잖아요.

수사관: 그 녀석이 걸어온 길들, 그 거리와 여정을 안다는 말씀이시죠?

취향: 네. 조사해 왔거든요. 초반에는 목격담이 많았어요. 그 녀석도 역사를 따랐던 걸까요? 혹은 선조가 있었을지도 모르죠. 철새들이 흔히 지나가던 길을 따르듯이, 처음엔 따듯한 곳을 찾아 나는 것처럼 보였어요. 갑자기 이곳저곳 기웃거리기 시작했죠. 하지만 뭔가 별다른 녀석이었음은 분명해요. 혹은 그렇게 보이고 싶었던가… 어쨌든 성공적이었죠. 모두의 이목을 끌었으니까요. 저희 연구단도 그렇게 그 녀석에 집중하기 시작했답니다.

그 녀석을 ‘지향’이라고 부르신다고요? 아하. 그 녀석의 목적지가 궁금하신 거로군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희 ‘취향’ 연구팀은 자세히 말씀드리기 어렵네요. 저는 그 녀석이 걸어왔던 길의 단면만 알고 있을 뿐이니까요. 하지만 이 연구가 당신네들의 몽타주에 도움이 안 되진 않을 거예요. 그 녀석이 처음부터 목적지를 정하고 비행을 시작한 건 아니잖아요. 저희의 연구는 단편적이지만, 그 녀석이 관심을 가졌던 중간중간의 정착지들을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 정착지들은 모두 일관된 궤도를 그리고 있구요. 이 취향이, 분명 찾으시는‘지향점’으로 향하는 데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요?

수사관은 취향이 설명하는 지향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흠, 갈매기를 닮은 녀석이라. 나름대로 이곳저곳 찌르고 다닌 모양이군, 이렇게 소문이 많이 남았으니 말이야. 취향이 건네준 연구 자료에 찍힌 지향의 궤도는, 아주 뒤죽박죽이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떤 규칙성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의 말대로, 많은 것을 경험하며 나름 입맛에 맞는 목적지를 정해낸 것 같은 모양새였다. 걸어온 발자취 중 가장 최근의 정착지에서 다음 증인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에게 달려 있는 것은 바로 가능성이었다. 지향의 최종 목적지에, 과연 수사관과 지향 중 누가 더 빨리 도달할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다행히도 그는 지향과 직접 대화한 적이 있다고 했다. 수사관이 궁금해 하던, 그 스피드에 대해 말이다.

개성: 아, 그래요. 아주 최근에 그 분을 봤죠. 아주 짧은 만남이었지만 인상적이었습니다. 만 오천 번의 날갯짓당 한 번씩 쉬어가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분게 여정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었습니다. 가장 궁금했던 건 속력, 스피드였죠. 아주 순식간에 제 앞에 나타나셨거든요. 저는 물었죠. 언제부터 그렇게 빠르셨습니까? 저도 그렇게 빠르게 날 수 있을까요? 그 분은 대답하셨습니다. 저는 생각보다 그렇게 빠르지 않아요. 20노트, 다음 달이면 21노트 정도의 시속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덧붙이시면서, 그 분은 시험 삼아 제 눈앞에서 몇 바퀴 돌아 보이셨습니다. 확실히 가까이서 보니 그리 빠른 것 같진 않더군요. 그 분은 매년 조금씩 빨라지고 있다고 말씀하시며, 이것도 많이 나아진 것이라고 하셨죠. 아주 겸손하셨어요. 자책하는 것처럼도 보이셨죠. 더 빠르고 싶다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본인에게 맞는 최적의 속도란 걸 알고 계신다고 하셨죠. 더 빨리 날다간 깃털이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다 빠져버려 아주 우스운 꼴이 될 거라고 하시면서요. 그분의 속력은 사실 좀 괴상했습니다. 굉장히 들쭉날쭉했거든요. 마치 감기 걸린 사람이 내쉬는 불안정한 숨처럼, 빨라졌다가, 슬로우 모션이 걸린 것처럼 굉장히 느려지곤 했습니다. 묘기 혹은 사고를 보는 것 같았죠. 멀리서 그저 날아오는 걸 볼 땐 빨라만 보였는데, 굉장히 번거로운 스피드를 가지고 계셨던 겁니다. ‘불편하지 않으세요?’ 저는 여쭈었습니다. 그분은 답하셨죠. ‘불편해요. 하지만 저는 이렇게 날고 싶어요. 이렇게 날아야 합니다.’

수사관: 잠깐, 잠깐만요. 조금 복잡하군요. 그러니까… 처음엔 굉장히 빨라 보여서 부러울 정도였는데, 본인은 아니라고 주장했다구요. 속력은 20에서 21노트 정도구요? 자세히 관찰하다 보니 그냥 빠른 게 아니라 시시각각 변하며 불안정해 보였는데 그게 본인이 추구하는 방식이었다구요? 이유는 뭐라던가요.

개성: 마침 그 부분을 이야기하려고 했습니다. 그분이 말하시길, 시작은 느릿한 날갯짓으로 세상을간 보듯 시도해 본다고 하십니다. 그러다 보면 닿고자 하는 지점들이, 한붓그리기의 점처럼 실체화되어 눈에 보인답니다. 마치 게임처럼 말입니다. 그럼, 그때부터 온 힘을 다해 그 점들에 덤비는 거라고. 그렇게 짧은 점들을 온 몸을 다해 이어나가다 보면,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생긴다고 하셨습니다. 스스로가 어디로 나아가고 싶어하는 사람인지, 그 점들은 사실 다 한 방향이라고 말이죠. 그래서 불편하지만 그런 괴상한 스피드를 지닐 수밖에 없으시답니다. 자기 자신이 누군지 알지 못하면, 목적지를 향해 절대 뛰어내리지 못한다나.

수사관: 목적지! 그래요, 목적지! 그 놈, 아니 그 분께서 목적지에 대해서 말씀하신 적 있나요?

개성: 아뇨, 안 그래도 궁금해서 여쭤보려던 찰나였습니다. 그래서, 어디로 가십니까? 목적지는 정하셨나요? 음, 제가 정하셨나요의 나… 까지 말했을 즈음일까, 그 분은 목을 한 바퀴 비잉 돌리시더니 날개를 옴죽옴죽, 넓게 피셨고, 순식간에…

수사관: 순식간에?

개성: 순식간에 뿅! 눈 앞에서 사라지셨답니다.

수사관: 이거 장난하나.

개성: 진짭니다! 다음 ‘지점’이 눈에 보이신 게 틀림없습니다. 쉴 땐 쉬시더라도, 지점이 한번 눈에 보이면 달려가시는 분이시니까요. 그야 촉박하신 거겠죠. 비행이 곧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 간다고 하셨다니까요.

개성이 말하는, 묘사하는 지향은 괴상했다. 개성 자체도 좀 괴상한 놈처럼 보였지만 말이다. 그 놈은 나름의 루틴을 가지고 있는 모양인데, 그게 마냥 편하고 합리적인 방법은 아닌 것 같다고, 수사관은 생각했다. 멍청한 놈인 걸까, 아니면 뭔가 다름을 추구하려는 걸까? 뚝심 하나는 대단해 보였다. 하지만 오히려 수사관에게는 잘된 일임이 틀림없다. 그야, 그의 수색 부대가 가지고 있는 최첨단 기술의 비행 편대를 동원한다면 그 괴상한 속력을 가진 지향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로 ‘지향점’에 도달할 수 있음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수색 가능성에 대한 확신을 얻었으니, 마지막은 가장 중요한 증인인 기억을 만나볼 차례였다.

기억: 나는 꽤 오랫동안 그 친구과 함께했지. 아주 알이던 시절부터 말이야. 최근에는 많이 본 적 없지만… 그 친구는 날아서 바다를 자주 건너. 버거워 보이는데도 말이지, 항상 바다를 건너고, 기진맥진해진 채로, 여러 도시를 경유한 후 다시 더 넓은 바다로 향하곤 했지. 알아요. 나에게 그 여정의 ‘방향’을 물으시려는 거지? 음, 글쎄. 방향이라는 게 워낙 방대한 이야기여야. 하나씩 훑어 볼까, 일단 위로 향하진 않아. 독특하지? 보통은 더 높은 곳, 더 밝은 곳을 찾아 나니까. 목표가 있는 놈들이라는 게 다 그렇지. 하지만 지향이는 조금 달라. 각도로 말하자면 완전한 수평. 섣부르고 겉멋 든 도전보다는 안정적이고 넓은 시야를 중시하는 수평선 비행을 즐겨.
가까이서 보자면 정확한 직선궤도로 날아가지. 하지만 멀리서 보면 둥그런 원일 거야. 우리는 모두 둥그런 지구 위에 사니까! 쓸데 없어 보이지만 나름 중요한 이야기야. 나는 그 친구를 알거든. 가끔은 어느 누구와도 닿지 않고 꼿꼿한 직선처럼, 스스로를 위해 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이 세상을 알고 싶어해요. 자기만 아는 놈들은 오히려 별로 안 좋아하지. 각도는 그런 느낌이고, 동향을 보자면… 동쪽을 향해 날아가지. 동쪽을 향해 나는 게 무슨 의미냐구? 우선 첫 번째, 제트기류를 탈 수 있거든. 그 친구는 지름길을 즐겨 타. 속된 말로… ‘꼼수’ 쓰기를 좋아하지. 쉬운 길이란 거, 좋잖아?

수사관: 앞선 증언과 조금 반대되는 것 같은데요. 개성 씨께서는 분명, 그 분이 부러 불편함을 감수하시며 독특한 스피드 루틴을 고집하신다고..

기억: 그거랑은 완전히 다른 얘기지! 그 속력 이야기는 그 친구의 고집이 앞서는 구간이구요, 이건 뭐랄까.. 방법에 대한 거야. 어떤 속력으로 날던 간에, 힘을 조금 덜 들인다던지, 날갯짓을 조금 편하게 한다던지… 그런 이야기지. 알겠어? 본인의 그 스피드 루틴을 잘 실행할 수 있도록, 힘을 아낄 수 있다면 무조건 아끼려는 축이라는 거야. 여정 전체를 위해서 말이야. 성실히 제 갈길 가는 부류들에겐 약아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게 걔 스타일이야. 아무튼, 하던 얘기 마저 하자면… 동쪽으로 향하면 시간에 맞설 수 있어. 왜, 세상은 해가 도는 방향에 따른 시간이라는 법칙을 가지잖아. 물리적으로는 말이 안 되지만, 동쪽으로 꾸준히 날아가면 그 시간에 가끔은 맞설 수 있거든. 걔는 그 규칙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아. 몇 년차에 어디쯤에 도착해야 된다, 적어도 몇 살이 되기 전까진 이걸 이뤄내야 한다. 그런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걔의 ‘지향점’은 그런것은 아랑곳 않는 개념이거든.

수사관: 지향점! 그래요. 방향을 아신다고요. 그럼 최종적으로 그 목적지가 어딘지, 어디를 향해 나는지 아신다는 거군요.

기억: 아하, 몰라? 많은 이야기를 들어 왔다며. 연구소 사람들도, 개성이라는 작자에게도 다녀왔지만 이렇다 할 단서가 없었지? 난 내가 해줄 수 있는 이야기는 다 해 줬어. 그 친구에게 어떤 ‘지향점’은 없어. 걔가 향하는 곳은 결국 자기 자신일 거거든. 걔의 비행엔 목적지가 없어. 그저 직선으로, 곡선으로, 자기 자신의 다양하고 변형적인 속력으로, 지금까지 수많은 거리를 날아 왔고 계속 날아갈 거야. 세상을 알기 위해서 말야.그리고 그건 결국 걔 자신을 알기 위한 길이야. 그 비행이 스스로를 증명하는 길이거든. 여정이 의미가 있는거야, 바보야. 그 목적지가 아니라. 목적지가 따로 있겠어? 그 녀석은 계속해서 움직일 텐데. 움직이다 지쳐 날개를 멈추거나, 스스로 한 곳에 머물며 살기로 한 그 곳이 목적지가 될 지도 모르지. 원한다면 그 둥지를 파헤쳐 봐! 하지만 씹다 남은 쥐 뼛조각 뭉치나 나올까 모르겠네. 애초에 허상이라니까, 친구. 지향점 같은 건. 날기 위해 태어난 존재니까, 그저 매 순간 움직여야 하는 법이라고.

수사관은 맥이 탁 풀린 듯 의자에 깊게 몸을 묻었다. 다들 밥이나 드시고 가시죠, 이제는 별 쓸모없는 종이 뭉치가 된 파일들을 대강 한 데 뭉쳐 정리하며 그는 예의상 중얼거렸다. 하지만 민망할 만큼 조용한 정적만이 답변을 대신했다. 조금 자존심이 상한 그는 고개를 들어 증인들을 살폈다. 그들의 시선은 모두 창 밖 한 점을 향하고 있었다. 수사관 또한 자동으로 그 점에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가만 눈을 찡그리자, 느릿하게 움직이는 점이 보였다. 어라, 그것은… 아주 괴상한 궤도로, 속력으로, 방향으로, 나아가는 알바트로스 한 마리였다. 약속한 것처럼, 동시에 셋은 외쳤습니다. 그 녀석이다/분이세요/친구네! 수사관은 뒤늦게 중얼거렸습니다. 저게 내가 찾던 지향이구나. 지향은 저렇게 움직이는구나.

SOUL FOOD:감자와 콘비프

한 아일랜드인이 부엌에서 노래를 흥얼거리며 재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가 선보일 오늘의 요리는 감자와 콘비프입니다.

Low lie the Fields of Athenry
아덴라이의 낮은 들판
Where once we watched the small free birds fly.
한때 자유로운 작은 새들이 날아다닌 것을 지켜보던 곳
Our love was on the wing we had dreams and songs to sing
우리의 사랑은 하늘을 날아다녔고, 우리에게는 꿈과 부를 노래가 있었지
It's so lonely 'round the Fields of Athenry.
(하지만 이제) 아덴라이 들판은 너무나도 외롭다네
_ The Fields of Athenry (아덴라이의 들판, 아일랜드 민중가요)

물 3.5리터를 부어요. 소금 한 컵, 설탕 반 컵, 염지용 핑크 솔트 2티스푼 -고기의 색을 멋진 분홍빛으로 만들어 주는 아질산나트륨이죠-, 피클용 향신료 1티스푼을 넣고 녹을 때까지 잘 저어 주세요. 마늘 알과 생강 3알을 편 썰거나 짓이긴 뒤 퐁당 빠트립시다. 마늘과 생강의 향이 물에 배어날 때까지 잠시 보관해 두세요. 이 물은 고기를 염장하는 데 쓸 겁니다.

신선한 차돌양지를 준비하세요. 이 양지로 말하자면, 아일랜드 켈트 방목지의 푸른 초원에서 먹여 키운 건강한 소의 고기랍니다. 흠, 이런 좋은 고기를 위해서는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하죠. 제가 대가라고 했나요, 많은 돈, 많은 시간, 그리고 많은 사람의 노력이라는 말이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어쨌든, 이 건강한 붉은 빛이 보이시나요?

손바닥에 힘을 주어 고기를 토닥거리듯 눌러 봅시다. 혈기와 대비되는 냉기가 조금 이질적이지만, 신선함의 상징이니까요,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만약 딱딱하고 두꺼운 비계가 잡힌다면 그 부분만 칼로 조심스레 떼어내 주세요. 모두 제거할 필요는 없어요. 질 좋은 지방은 맛이 좋으니까요. 이건 소고기예요, 어떤 부분이든 감자 따위의 채소와는 비교가 안 되죠.

손질한 고기를 만든 염장액에 담가 숙성합니다. 커다란 냄비에 덩어리 전체가 담기게 넣고 일주일 정도 두면 됩니다. 아주 길죠? 하지만 덕분에 오랜 시간 동안 보관하며 먹을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비상 대책이에요, 먹을 게 없어질 때나, 장소로 나아가게 될 상황을 대비하기 좋은 저장 식품입니다. 조금만 기다립시다, 완성한 콘비프는 기다린 시간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숙성이 끝난 고기는 흐르는 물에 씻습니다. 커다란 오븐을 160도로 예열하고, 흑맥주를 부어 주세요. 고깃덩어리가 중앙에 오도록 로스팅 팬을 조절한 후 염장된 양지 위에 굵은 겨자와 흑설탕을 뿌립니다. 맛에 포인트를 줄 수 있을 거예요. 2시간 정도 천천히 조리하다 보면 육즙이 충분히 흘러나왔을 테죠. 그 국물에 감자를 넣고 15분 정도 더 요리합니다.

감자는 콘비프에 빠질 수 없는 가니쉬(곁들임 요리)죠. 때로는 식사의 메인이 되기도 해요. 지긋지긋합니다. 아니, 제가 방금 지긋지긋하다고 했나요? 그럴 리가요, 아주 소중한 우리의 식재료인걸요. 아무튼 타거나 너무 조리되어 뭉그러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 주세요. 완성된 콘비프는 슬라이스하기 전 20분 정도 레스팅의 시간을 가집니다. 육즙의 손실을 막을 수 있어요.

천천히, 조심스레, 지나온 시간이 헛되지 않도록 공들여 요리를 마무리하도록 해요. 헤비크림과 머스타드를 이용한 소스를 곁들여도 좋습니다.

완성된 콘비프를 가만히 내려다봅니다. 우리는 이걸 먹기 위해 아주 오랜 시간을 기다려 왔어요. 정말로 오랜 시간을 말이에요.

고기 덩어리를 칼로 잘라낸 뒤 조금 집어 입에 넣고 씹습니다. 부드러운 육질이 인상적입니다. 와 닿는 소금의 짭조름함 뒤에 옅게 느껴지는 흑설탕과 향신료의 향이 기분 좋은 자극이 됩니다. 물론 고급 스테이크나 싱싱한 멧비둘기 고기 따위엔 비할 바가 못 되겠지만, 소박한 매력이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감자도 한 조각 집어 들어 맛봅니다. 푹 익은 감자는 조금의 압력을 주어 혀로 누르는 것만으로도 부드럽게 부서집니다. 고기의 육즙을 흡수해서인지 나름대로 풍부한 맛이 나는 것 같아요. 눈을 감고 꿀꺽 삼켰을 때, 동시에 목구멍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미는 것을 느낍니다. 콘비프는 오래 보관할 수 있죠, 많은 콘비프가 켈트 방목지에서, 아덴라이 들판으로부터 세계로 퍼져나갑니다.

전쟁은 전장이 아닌 곳에서도 일어납니다. 아일랜드에선 많은 소가 자랐습니다. 소만큼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사람이 굶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아시나요? 이런 콘비프를 먹지 못하면 죽는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이런 감자조차도 먹지 못해 죽는 것입니다. 우리의 땅에서 우리를 위한 작물을 기르지 못해 죽어버리고 맙니다. 우리의 어머니와 아버지와 형과 오빠와 언니와 누나와 동생들이, 아이들이,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감자 대신 땅에 묻혔습니다.

그래서 나는 콘비프를 요리합니다. 성 패트릭을 위하여, 아일랜드를 위하여, 우리 민족을 위하여, 켈트 방목지를 위하여, 지긋지긋한 감자를 위하여, 남의 전쟁을 위해 죽어야 했던 언젠가의 시대를 위하여,

… …
참으로 번거로운 과정이었어요. 귀찮다면 다음의 방법을 이용해도 괜찮습니다. 1. 슈퍼마켓에서 콘비프 통조림을 구매한다. 2. 프라이팬에 넣어 데운다. 3. 감자를 삶아 곁들인다. (감자는 정말로 빠져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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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의 콘비프 앤 포테이토 레시피>
재료:
차돌양지 덩어리 3kg
굵은 소금 1컵
설탕 1/2컵
독립 투쟁 400년
염지용 핑크 솔트 2tsp
피클링 스파이스 1tsp
감자잎마름병 적당량
월계수 잎 3장
마늘 5알
생강 3알
통후추 1/2tsp
물 3.5리터
양배추 500g
당근 1개
감자 8개
아일랜드인 160만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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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마이클에게서 아일랜드의 소울 푸드 레시피를 배웠습니다. 마이클이 만들었던 콘비프는 ‘소금에 절인 소고기’라는 의미로 아일랜드 명절인 ‘성 패트릭 데이’를 대표하는 음식입니다. 현대에 와서는 통조림 음식으로 더 잘 알려졌지만, 직접 만드는 콘비프는 캔에 든 것보다 훨씬 맛있다고 하네요. 이 아이리시 디너에서, 가니쉬로 곁들인 감자는 소박해 보이지만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감자는 참 위대한 식물입니다. 아일랜드의 척박한 기후에서도 잘 자랄 수 있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거든요. ‘구황’ 작물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농한기 많은 서민의 허기진 배를 채워 주었고요. 감자를 좋아하시나요? 부드러운 흰 빵의 풍미나 쌀의 포만감에는 못 미치겠지만, 나름의 투박한 구수함도 있지 않나요.

감자하니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네요. 아일랜드 대기근에 대해 아시나요? ‘감자 기근’이라고도 불리는 역사죠. 1845년에서 1852년, 아일랜드 섬에서는 감자마름병이라는 작물 병이 돌아 100만 명이 아사하고 100만 명이 기근을 피해 이민길로 올랐습니다. 그런데 단지 감자에 역병이 돌았을 뿐인데, 왜 아일랜드 사람들은 굶주리거나, 죽음을 피해 고향을 떠났어야만 했을까요? 다른 음식을 먹어도 됐을 텐데 말입니다.

19세기의 아일랜드는, 인구 1/4의 부유 계층이 토지의 8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빈부격차가 심했습니다. 아일랜드는 12세기 이래로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에, 대부분의 농지는 영국을 위한 소, 돼지, 밀을 기르기 위해 사용되었고, 얼마 남지 않은 척박한 토지에서 그나마 사람들의 배를 채울 수 있던 작물이 감자였죠. 17세기 초부터, 감자는 아일랜드 사람의 주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당시 영국이 1년마다 가져가던 밀의 양은 아일랜드 사람 전체가 먹을 수 있었던 양이었지만, 그들이 먹을 수 있는 것은 감자뿐이었고, 그렇기에 감자의 병은 곧 그들의 병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콘비프는 어떨까요, 콘비프의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지만, 본격적인 생산은 영국의 산업 혁명과 함께 시작됐습니다. 소금에 절인다는 요리 방식으로 인한 오랜 저장 기간 덕에 콘비프는 아전 식량으로써 각광받았습니다. 북미 군대, 프랑스의 식민지 개척, 영국 해군 함대의 식량으로 쓰이며 방대한 수익을 창출했죠. 맛없는 건빵만 먹던 해군들에게 초기에는 획기적인 인기를 끌었지만, 결국은 모든 전쟁 식량들이 그렇듯 인기를 잃고 말았습니다.

빼앗긴 아델라이 들판에서 감자 대신 자라난 소들은 콘비프가 되어 세계로 뻗어나갔습니다. 콘비프처럼 아일랜드를 떠난 이주민들은 대서양을 건너며 60%가 죽었지만, 살아남아 영국에 도착한 아일랜드인들은 콘비프의 가치를 알고 있었죠. 그들이 아일랜드계 영국인으로 더블린에 자리를 잡고, 아일랜드가 독립을 이뤄내는 사이, 콘비프는 값싸고 흔한 음식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콘비프는 고향을 떠나온 이민자 아일랜드인에게 대기근의 아픔을 떠올리게 하는, 그 무엇보다도 상징적인 음식이 되었던 것입니다.

아일랜드인 소설가 존 미첼(John Mitchel)은 <최후의 아일랜드 정복(The Last Conquest of Ireland)>에서 영국의 아일랜드 정책을 강력하게 비난하며 “영국인들은 그 기근을 ‘신의 섭리’라며 오로지 감자 마름병 탓으로 돌리고 있다. 그러나 당시 유럽 전역이 비슷한 흉작을 보였지만 아일랜드에만 기근이 들었다. 영국인의 생각은 기만이고, 신을 모독하는 처사이다. 신이 감자 마름병을 보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근을 만든 것은 영국인이었다.”
_ 피터 그레이,『아일랜드 대기근(Irish Famine)』

동반, 등반 - 다시 태어나도 우리
티베트의 고승 중에 서도 가장 위대한 현자, 달라이 라마. 그의 린포체가 여느 때처럼 생의 환을 회전해 탄생했다. 그것도 고향 티베트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인도의 라다크, 삭티에서!

우리가 살아가며 느끼는 한계는 실로 다양하다. 나를 부정하는 타인에서부터 내가 가진 이상과 현실의 괴리, 끝이 없는 자아의 방황까지. ‘무소의 뿔’처럼 마냥 헤쳐나가기에 이 광야는 너무나도 넓고 거칠어 보인다. 한계를 열정으로 극복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무한 번 도전했습니다, 운명 같은 기회가 그때 제게 찾아왔습니다... 드라마틱한 성공의 신화들은, 지독한 현실에 상처받은 마음으론 너무나도 멀게 느껴진다. 그럴 때 우리를 달래 주는 이야기는 동반에 대한 것들이다. 그렇다, 우리는 저마다의 고난을 저마다의 동반자와 함께 이겨낼 기회를 얻는다. 가족이, 친구가, 종교가, 반려동물이, 어쩔 땐 공동체 자체가 나의 동반자가 되어 나의 도전을 거든다.

지금부터 동반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 한 편을 소개하려 한다. 여러모로 낯설면서도 어쩐지 익숙한 이야기. 한계에 관한, 현실에 관한, 동행에 관한, 그리고 도전에 관한 이야기. 약간의 스포일러를 덧붙이자면, 결국엔 영화가 아니라 삶이라 더 의미 있는 이야기.

기基

페이드 인, 먹먹한 바람 소리. 고고하게 늘어선 모랫빛 산맥들. 이어서 장면 전환. 바람에 나부끼는 색색의 법어 깃발(룽다). ‘라다크, 인도 북부/해발 3500’
1400년 전, 티베트 불교가 시작되고 많은 수도승이 생겨났다. 이들은 전생에 다 이루지 못한 업을 잇기 위해 몸을 바꿔 다시 태어났다. 우리는 이들을 ‘린포체'라 부른다.
(다시 태어나도 우리, | 2007)

티베트 불교, 전생, 린포체. 21세기 현대인의 상식으로는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환생이라는 전제를 이 영화는 문장 세 개로 일축하며 시작한다. 티베트 불교에서 ‘린포체’는 고승의 전생자를 의미한다. 대표적으로 티베트의 정신적 지주인 달라이 라마는 관세음보살의 현신으로서 환생을 거듭하며 그 지위를 상속한다. 달라이 라마와 같이 수행이 깊은 고승들은 입적하기 전 환생할 장소를 예고하고, 제자들은 이를 바탕으로 후대 라마, 즉 린포체가 될 아이를 찾아 떠난다. 영화 ‘다시 태어나도 우리’는, 티베트가 아닌 ‘인도의 라다크, 샥티’에 환생해 버린 어린 린포체 앙뚜와 그의 노승 우르갼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주인공 앙뚜는 다섯 살이 되었을 때 들어본 적도 없는 티베트의 지명을 대며 자신의 전생을 주장했다. 계속되는 특별한 행동과 언행, 또렷한 전생의 기억을 증거로 앙뚜는 여섯 살의 나이에 린포체 시험을 통과했고, 공식 인증을 받아 린포체로 즉위하게 된다. 어린 나이인 앙뚜가 올바른 배움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원래 그의 선생님이었던 우르갼이 그의 보필을 맡았다. 시골 의사였던 노승은 그 순간을 기점으로 소년의 스승이 아니라 위대한 린포체의 제자로서 앙뚜와 함께한다.

앙뚜는 엄숙하게 신도들에게 은총을 내리다가도,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눈밭을 뛰어다닌다. 우르갼은 보호자의 모습으로 항상 그의 곁을 지키고 있다. 스님들을 불러 모은다는 나팔 피리 ‘뚱’ 부는 법을 알려주기도, 눈밭에서 눈싸움에 어울려 주기도 한다. 그 짧은 순간에도 우르갼은 눈 뭉치를 던지는 척 앙뚜의 발 곁에 밀어주고, 앙뚜가 옳다구나 집어 들어 던지면 피할 생각도 없는 듯 맞아 주며 웃는다. 어린 스승과 주름살이 자글한 제자의 조합은 기이하지만 제법 따듯하게 마음 한구석을 덥힌다.

둘의 신뢰는 세월을 뛰어넘어 굳세게 결속되어 있다. 나이 지긋한 우르갼의 모습을 보며 우리 조부모님들의 모습이 떠오를 수도 있겠다. 그래, 어떤 신앙을 가지고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일과를 보내든 간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은 본질에서는 같은 듯싶다. 우리는 동반자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세상을 지휘할 만고의 지혜, 어떤 잘못이라도 용서해 줄 무한한 관용보다는 오히려 일상적인 순간들이 오래도록 남아 삶을 버텨 낼 용기가 된다. 외할머니댁 마루에 앉아 발을 달랑일 때 건네주시던 찐 옥수수 한 바구니, 어린 몸을 업어 올려 더 큰 세상을 맛보여 주던 너른 등 같은 것들 말이다. 둘의 이야기도 별반 다르지 않다. 우르갼은 앙뚜가 불교 공부를 하도록 이끌 뿐, 별달리 특별한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린포체의 보필이라는 언뜻 막중하고 위대해 보이는 업무도 때로는 시린 손발을 주물러 주고 영어 교과서를 찾아 건네는 것으로 충분하다. 함께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어떤 휘황찬란한 말보다도 서로가 서로를 유의하고 있다는 사소한 단서가 힘을 준다. 그 속에 넉넉히 스며 있는 따듯한 온정이 어린 우리의 영혼을 바른길로 이끌어 주는 훌륭한 이정표가 된다.

승承

다시 검은 화면에서 페이드 인. 라다크의 파란 하늘에서 틸트 다운, 어설픈 사슴 탈을 쓰고 춤을 추는 앙뚜의 모습. ‘전생의 기억들이 점점 흐려지고 있어요. 이제는 티베트도 안 보이고.. 앞으로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린포체의 본래 선업을 잇기 위해서는, 제자들이 찾아와 환생한 스승을 모셔 가는 것이 의례이다. 하지만 앙뚜는 고향 티베트로부터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인도의 라다크에서 환생했다. 중국이 내린 티베트 봉쇄령으로 앙뚜는 캄 사원을 그저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 티베트에서 제자들이 그를 데리러 오지 않자, 라다크의 사원에서는 그 자격을 의심하며 앙뚜를 내보내려 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앙뚜의 기억은 흐려지기 시작한다. 전생을 깨닫게 된 지 벌써 오 년째, 언제까지 기다리기만 해야 할까. 소년은 흩어지는 기억을 붙잡아준다는 이야기를 따라 우르갼이 만들어 준 사슴 탈을 쓰고 춤을 춘다.

중국 정부의 탄압, 어렸을 때부터 살아온 사원에서의 퇴출, 그리고 혼란을 겪기 시작한 자아까지. 눈 덮인 고원, 신비로운 피리 소리가 뛰놀던 환상 같은 이야기 속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역경들을 겪기에 화면 속 아이는 너무 어려 보인다. 그리고 가슴이 쓰리다. 단지 동정의 마음에서가 아니라, 앙뚜가 겪고 있는 혼란이 어쩐지 익숙하기 때문이다.

‘사실은 말이야, 난 지금까지 사원도 하나 없어. 그래서 가끔씩 이상한 사람들은 날 앞에 두고도 '넌 사기꾼이야'라는 말까지 해. 가끔은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느껴져.‘

앙뚜와 비슷한 감정을 느껴본 적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기분’, 나를 정의하던 것들이 희미해지고 내가 굳게 믿던 것들이 휴짓조각이 되어 짓밟힐 때. 나와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를 뼈아프게 실감하고 외로워질 때 말이다. 대한민국의 정신적 보릿고개인 고3 시절 소신을 버리고 현실에 순응했을 때일 수도, 부모님과 이루지 못한 꿈을 두고 뒤늦게 다툴 때일 수도, 꽉 막힌 주변인들에게 내가 중요시하는 가치를 설득하려 애써볼 때일 수도 있겠다. 사람은 결국 사회적 존재이기에 자아는 어쩔 수 없이 타인과 결속된다. 제아무리 단단한 자기의식을 가지고 있더라도, 공동체와 사회 속에서 계속해서 부정당하다 보면 끝내 자신을 의심하는 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그 단계에 이르면 우리의 발걸음은 틀어지기 시작한다. 부처가 아라한을 죽이고 향하라고 일렀던 수행의 길이 아니라, 존재의 경계를 뭉그러뜨리는 고비의 낭떠러지를 향해 걷게 된다.

타자와의 마찰에서 오는 이런 혼란은 아이러니하게도 동시에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극복될 수 있다. 사람들이 서로를 결코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상처받는다는 사실은 그런 차이를 극복하고 다가오는 신뢰가 더욱 소중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가 겪는 혼란이 낭떠러지 아래로의 추락이라면 그런 신뢰는 다시 올라갈 길을 비춰 주는 램프와 같다. 그러나 동행은 결국 함께 ‘걷는’ 길이다. 부축해 주는 동료가 있더라도, 진정한 의미의 동행은 홀로서기 이후에 가능하다. 앙뚜의 번뇌는 곧 우르갼의 번뇌가 되지만 그가 건넬 수 있는 것은 사슴 탈 뿐이며, 그 탈을 받아 머리에 쓰고 춤을 추는 것은 오직 앙뚜의 몫이다. 두 명이 각자의 걸음을 온전히 내디딜 수 있을 때, 자아의 혼란을 이겨 내고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서 광야를 향해 출발할 때, 비로소 두 명 몫의 발자국은 아름다운 그림이 될 수 있다.

전轉

다시 페이드 인, 우르갼의 얼굴이 싱글 샷으로 등장. 잠든 앙뚜의 모습 인서트, 카메라를 향해 중얼거리는 노승. 희미하지만 확고한 목소리.
“남들이 먼지 구덩이에서 구르는 린포체라고 수군거려도, 언젠가는 린포체가 그의 사원으로 갈 수 있게 제가 그 길을 만들어 줄 겁니다.” ....

진정한 린포체가 되기 위해선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걸맞은 교육을 받기에 라다크는 너무나 좁고 황량한 세계다. 우르갼은 고민하며 시기를 미루지만, 어린 린포체는 결연히 선택을 털어놓는다. ‘이제는 제 운명에 대해 저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할 때가 온 것 같아요. 티베트에서 저를 찾으러 아무도 오지 않는다면, 이제 저 스스로가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더 미루지 말고, 내일이라도 당장.’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열두 살 남자아이의 눈빛은 꼿꼿하다. 우르갼이 차마 권하지 못해 몇 년을 미뤄 왔던 고된 여정의 길에 어린 몸을 던지기로 한 것이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스승이자 제자인 우르갼이 함께이기에 할 수 있었던 선택이겠지. 노인과 소년은 가냘픈 손가락을 맞잡아 쥐고 히말라야라는 거대한 벽을 한번 타올라 보기로 했나 보다. 본인조차도 확언하지 못하는 린포체의 자격을 우르갼은 누구보다 깊게 믿어 주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눈으로 뒤덮인 광활한 대지에 자기만의 발자국을 남기며 살아간다. 하지만 린포체로 태어난 사람은 다르다. 그는 이미 전생의 발자국이 선연하게 남아 있는 설원에 내던져진 존재로, 이승의 환생체는 그 발자국을 착실히 이어나가야 한다.’

앙뚜와 우르갼은 세상 모든 눈을 모아둔 것만 같은 하얀 도화지 위에서, 운명이 희미하게 남겨 놓은 자국을 쫓아 걷는다. 걷는 사람은 둘이지만 흔적은 하나이기에 이별은 예정되어 있다. 정말 만에 하나 무사히 캄에 도달하더라도 우르갼과 앙뚜는 헤어져야 했다. 끝내 갈라지게 될 것을 알면서도 함께하는 여정에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도달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내딛는 걸음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모든 동행은 이별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우리는 헤어짐이 두려워 관계를 끊어내지 않는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해야 할 이유도 같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것, 매 순간 그저 진리를 섬으로 삼아 해야 할 바를 성취하는 것. 어떤 도전들은 결과에 상관없이 그 자체가 하나의 태도가 되어 우리의 인생에 거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저 포기하지 않고 도전했다는 기록이 곧 또 다른 가능성으로 이어진다. 설사 그것이 궁지에 몰려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마지막 보루였더라도 괜찮다. 떼기 싫은 한 걸음을, 괴로운 말 한마디를, 미루던 클릭 한 번을 해 버리고 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할 수 있는 인간’ 이 된다. 무엇을 해냈는지보다, 벽을 타고 오르려는 불굴의 의지가 우선순위에 앞선다. ‘할 수 있는 인간’은, ‘성공‘ 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라 ‘도전’ 할 수 있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라면, 도전은 성공의 할머니쯤 될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 나와 함께했던 동행자와의 흔적이 남는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실패 또한 성공이 될 지도 모르지.

결말結末은 없어요, 이건 드라마가 아니라 다큐멘터리니까요.

줌 아웃. 도화지같이 흰 눈밭 위 얼룩 자국처럼 묻어 있는 두 사람의 모습, 롱 샷.
화면을 하얗게 메우는 눈보라 소리가 스피커를 울린다. ‘스승님, 캄이 보이지 않아요.’ ‘소라 나팔을 불어 보세요. 캄의 스님들이 듣게. 어쩌면 당신이 부르는 소리가 그곳까지 전해질 겁니다.’

부우우, 작은 소라나팔이 외치는 호출은 너무나도 쉽게 눈보라 사이에 묻힌다. 앙뚜는 우르갼을 껴안고 목놓아 울지만 눈보라는 그 소리마저도 게걸스럽게 집어삼킨다. 우르갼과 앙뚜는 티베트 캄에 도달하지 못하고, 두 달의 기다림 끝에 접경지 주변의 한 사원에서 앙뚜의 린포체 교육을 허가받는다. 둘의 이별은 현실이 되었지만,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앙뚜는 이곳에서 린포체의 삶을, 우르갼은 넉 달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 노승이자 암차로서의 삶을 이어 나가게 됐다.

페이드 인, 접경지의 사원에서 점프컷. 어느새 우르갼과 앙뚜의 이별 장면. 둘은 흙바닥에서 무언가를 집어 들어 던지는 시늉을 한다. 필로우샷. 깔깔 웃던 앙뚜는 이내 바닥에 엎어져 눈물을 터트린다. 작중 처음으로 우르갼 역시 눈물을 흘린다. 클로즈업.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겁니다. 모든 것이 다 잘 될 테니 걱정 마세요. 눈싸움이나 할까요?‘ ’여기는 눈도 없는데요.‘ ’눈 여기 많이 있네요.‘

눈이 다 녹은 땅 밭에서 둘은 가짜 눈싸움 놀이를 한다. 손발을 꽁꽁 얼리고 고향 캄을 가리던 눈은 여기선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다시 불투명해진 미래에도 둘은 초연하고 씩씩하게 다음을 기약한다. 공부를 마친 15년 후에는 우르갼이 아기처럼 늙어 있을 테니, 그때엔 자신이 모시겠다고 당부하는 어린 린포체의 눈빛은 너무나 결연하다. 우르갼은 손을 몇 번 흔들고 라다크를 향해 돌아선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간 후, 7개월간 묵언 수행을 했다.

책과 영화를 합쳐도 고작해야 몇 시간 남짓 그들을 만나 봤을 뿐인 나보다 당연히 그들의 아쉬움과 슬픔이 짙고 깊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눈물을 깔끔히 닦아내고 먼 미래를 기약하며 자신의 발자국을 단단한 흙 위에, 견고한 벽 위에 새겨 나간다. 그들의 동행은 끝났을지언정 동반은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다시 한번 깨닫는다. 천고의 벽 히말라야를 넘어 전생의 고향 티베트로 향한 여행뿐만이 아니라, 이어질 남은 생애 매 순간이 앙뚜와 우르갼에겐 도전일 것이라고. 실패라고 불릴 법한 그 여정의 결과는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위한 페이지에 불과하다고. 그렇기에 그들은 섣불리 영화의 크레딧을 올리지 않고 각자의 자취를 열심히 밟아 나가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은 한참 먼 땅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다를 것 없는 이야기임을 말이다.

영화 ‘다시 태어나도 우리’는 결국 다큐멘터리이고, 이 이야기는 현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단순히 대본 없이 찍어냈다는 뜻뿐만이 아니라, 앙뚜와 우르갼, 둘의 여정이 고스란히 전사하고 있는 삶의 속성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삶에서는 보통 기적과 같은 구원도, 아름답고 감동적인 결말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엔딩’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현실의 이야기에도 ‘끝’은 없다. 한 번의 실패가, 성공이 우리의 삶에 계급의 도장을 찍지 않는다. 그렇기에 매 순간은 소중하고, 크고 작은 도전 하나하나는 저마다의 무게를 갖는 것이겠지. 무작정 아름답지 않아도 괜찮다. 삶은 드라마가 아니니까.

아주 조그만 일상의 스트레스에, 나를 만류하는 사람들에, 세상의 편견에 버티고 서서 묵묵히 나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것. 모든 이들의 삶은 그 자체로 도전이다. ‘고비’는 피하거나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히말라야처럼, 언제나 그곳에 버티고 서 있다. 한계라는 벽을 버티고 오르는 것이 힘들어지는 순간이 분명히 올 것이다. 그런 순간이 오면, 당장 곁에 있지 않더라도 내 곁에는 나와 동반하는 수많은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스스로의 발자국을 새겨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위안 삼자. 실패 같던 결과도 결국엔 나에게, 또 다른 사람들에게 용기를 줄 테니까. 영화 속 낯선 종교 이야기도 들여다보면 우리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설정부터 판타지 같던 전개도 결국엔 익숙하고 답답한, 하지만 그래서 의연히 털고 일어날 만한 결말을 맞는다. 소울메이트, 영원한 동반자, 이런 수식어 속에서도 사실 진짜로 도움이 되는 건 함께라는 사실 그 자체와 굳은 믿음이다. 우리가 한계를 만났을 때, 힘이 되어 주는 건 작고 평범한 것들이다. 그래서, 벽을 넘지 못하더라도 그 발자국은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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