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으로
첫 번째 씨앗

가장 사랑하는 문장과 이미지 하나씩을 알려주세요.

누구나 자기만이 알고 있는 아픔의 리듬이 있다. (p.172)
_Pale Blue Dot

세 번째 씨앗

가장 최근에 관찰하거나 포착한 ‘일상’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최근에 잠자는 오리 모습을 실제로 처음 봤어요. 머리를 몸쪽으로 돌려서 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자더라고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불편할 것 같은데, 그 자세에서 안정감을 느낀다는 게 신기했어요. 집에 와서 찾아보니 홍학이나 두루미, 오리 등은 주로 습지에 살아서 체온을 보호하기 위해 머리와 한쪽 발은 몸속에 파묻고 한쪽 발로만 몸을 지탱하며 잔다고 하더라고요. 그 이후에 다양한 동물들의 잠자는 모습이 궁금해졌어요. 잠자는 사람을 볼 때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침묵하고 있고, 현실과 동떨어져 있죠. 눈을 감고 있는 사람의 옆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조용하고도 작은 산 같기도 해요. 잠자는 오리는 부드러운 바위 같더라고요. 예전부터 잠, 꿈, 침묵에 관심이 많았는데 잠자는 오리를 보면서 그런 것들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됐어요.

다섯 번째 질문

창작에 도움 혹은 영감을 주는 존재가 있다면 무엇, 혹은 누구인가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나요?

저에겐 ‘잠’이에요. (자꾸 잠 이야기를 하게 되네요.) 머리가 복잡하거나 작업의 답이 나오지 않을 때 잠자리에 누우면 이상하게도 많은 생각이 정리돼요. 꿈에서 답이 나올 때도 있죠. 베개 뒤편에 있는 또 다른 세계에서 저에게 말을 걸어오는 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해요.

일곱 번째 질문

앞으로 계속되어 갈 작가님의 ‘일상’에 어떤 지향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침착함을 유지하는 삶. 어렸을 때부터 감정에 크게 동요되지 않는 어른들이 참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기쁜 일이 있어도 과하게 기뻐하지 않고, 슬픈 일이 있어도 과하게 슬퍼하지 않는, 감정의 중심을 잡고 있는 어른들이요. 그런 어른들은 단단한 나무 같은 느낌인데, 어떤 풍파가 몰아쳐도 지혜롭게 다 이겨낼 수 있을 것처럼 보여요. 저도 그러려고 노력해요. 감정의 선이 너무 가파르게 올라가거나 내려가지 않게요. 감정의 중심을 잡는 건 ‘천천히, 적당히, 건강히 사는 삶’과도 맞닿아 있어요. 감정이 흔들리지 않으려면 조급해서는 안 되고, 뭐든지 적당해야 하고, 또 건강해야 하죠.

아홉 번째 질문

가장 인상 깊었던 반응, 피드백이 있다면 무엇이었을까요?

북페어에 나가면 독자분들과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할 수 있는데요. 종종 책을 읽다가 눈물을 보이시는 분들이 계세요. 그 이유를 직접 물어보지는 않지만, 서로의 아픔을 알아차린 것 같아서 저도 눈물을 참기가 어렵더라고요. 대화 없이 눈물이 그렁거리는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감정이 전해져요. 어떤 말보다도 가장 전율이 큰 반응이죠.

두 번째 질문

가장 사랑하는 장소로 가는 길을 설명해주세요.

언제나 가장 사랑하는 장소는 제가 머무는 ‘집’이에요. 학창 시절을 보냈던 잠실의 아파트, 첫 독립생활을 했던 연남동의 빌라, 2년 동안 머물렀던 베를린의 셰어하우스, 지금 사는 괴산의 회색 벽돌집까지. 제가 사랑했고 또 사랑하는 곳입니다. 저는 집에 있을 때 가장 큰 평온함과 안정, 그리고 창작의 욕구를 느껴요. 괴산에 와서는 집에 머무는 시간이 더 길어졌어요. 집에서 작업을 하고, 친구를 만나고, 업무를 보고, 밥을 먹고, 휴식을 취하고, 잠을 잡니다. ‘집’으로 가는 길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집은 항상 저의 출발점이자 도착점입니다.

네 번째 질문

창작에 대한 원동력과 가장 가까운 형태를 띄고 있는 감정은 무엇인가요?

창작을 시작하게 만드는 감정은 안정감. 제 주변 환경과 마음이 편안해야지 작업에 몰두할 힘이 생겨요. 하지만 작업에 빠져들면서부터 필요한 감정은 외로움이에요. 작업할 때 나의 세계에는 오로지 나만 들어갈 수 있어요. 그 외로운 감정을 모두 버텨내야지만 작업이 완성되더라고요.

여섯 번째 질문

창작에 있어 개인적인 소재나 경험, 감정들을 대하는 태도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최대한 객관적인 태도로 개인적인 경험과 감정을 대하려고 해요. <모래섬 D469>를 만들 때도 그랬어요. 처음에는 운동장 사진과 함께 당시에 운동장을 바라보며 썼던 글들을 담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다시 읽어보니 너무 감정적이더라고요. <모래섬 D469>를 만들 때 최대한 제 감정이 배제된 책을 만들고 싶었어요. ‘저는 이런 병이 있는데요. 이런 힘든 경험을 했고, 지금은 그 힘든 과정을 다 이겨냈어요.’ 하는 식의 책은 절대로 아니길 바랐어요. D469는 이겨내고 버텨야 할 존재가 아니고 저와 평생을 함께 가야 할 존재거든요. 이 상황을 있는 그대로 담고 싶었어요. 과장하거나 미화하지 않고요. 그래서 결국엔 병원 진료서를 함께 배치하게 됐죠. 저의 책들은 대부분 저의 이야기에서 시작하지만, 모두의 이야기로 끝났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때문에 최대한 담담하고 정제된 상태에서 이야기를 전하려고 노력합니다.

여덟 번째 질문

책을 만들어야겠다, 결심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는 원래 글을 쓰는 사람은 아니었어요. 처음에는 제 그림을 세상에 선보이고 싶어서 책을 내기로 결심했죠. 첫 책을 만들고 나서는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것보다 책 만드는 일 자체가 재밌어졌어요. 한 권의 책을 만드는 일은 하나의 전시를 하는 것과 비슷하더라고요. 책은 저의 전시 공간이나 다름없어요.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시간에 편하게 입장할 수 있는 전시 공간이죠. 그런 매력 때문에 계속해서 출판사를 유지하고 있고요.

열 번째 질문

으로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대다수 사람이 바라보는 관점과 다른 관점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평소에 잘 들여다보지 않는 이야기, 관심을 두지 않는 이야기요. <포개진 계절>은 초록 풍경 이미지와 함께 초록의 뒷면에 관한 글을 담았어요. 초록 뒤에 켜켜이 쌓인 수많은 계절과 죽음, 사라짐에 대한 글이요. <안부의 안부>는 사람들이 서랍 속에서 한동안 꺼내 보지 않았던 오래된 편지들을 다시 꺼내어보게끔 하고 싶었죠. 바쁜 일상에서 점점 잊혀 가는 걸 상기시키고, 매일 한 방향으로만 봤던 시선을 뒤집어서 보여주고 싶어요. 그게 책을 만들어서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은 가장 큰 이유예요.